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참회왕 에드워드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* 외모면에서는 키가 크고 혈색이 좋았으며, 머릿결과 수염도 아름다웠고, 전반적으로 왕으로서의 위엄을 풍기는 인물이었다고 한다. * 그가 쓰던 [[성 에드워드 왕관]]은 영국 역대 국왕들의 대관식 때에 대대로 물려쓰는 왕관이 되었다. [[올리버 크롬웰]] 시대에 한번 사라졌다가 [[찰스 2세]]가 다시 복원했고, 이래 역대 영국 국왕들이 대관식 때 사용했다. [[엘리자베스 2세]] 여왕도 이걸 썼다. * 1161년에 [[교황]] [[알렉산데르 3세]]에 의해 [[시성]](諡聖)되었다. 앵글로색슨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성되었고,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시성되었다.[* 공식 시성 절차를 밟진 않았지만 [[순교왕 에드워드]] 역시 관습적으로는 성인으로 공경받기는 했다.] 에드워드는 [[성 조지]]가 수호성인으로 지정되기 이전까지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으로서 오랫동안 공경받았다. 그런데 사실 그는 불같이 화내는 경우도 잦았는데다가 사냥도 즐겼기에 성인으로 시성된 것은 정치적인 배려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대다수다. * [[성공회]]나 [[가톨릭]]에서는 10월 13일을 축일로 지정하고 있다. * 에드워드의 깊은 신앙심은 25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생긴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정하는 입장이며, 중세에 그를 시성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것이라 보고 있다. * 세계적으로 유명한 [[웨스트민스터 사원]]과 관련이 있다. 에드워드 왕이 1042년 ~ 1052년 사이에 사원의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. 재건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이 묻힐 왕족의 교회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. 사원은 그가 죽을 때(1066년)까지 완공이 안 되었으나 하여간 그는 그곳에 매장되었다. 그러나 현재 보는 건물은 에드워드 시대의 것은 아니다. 재건은 1090년경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는데, 1245년에 [[헨리 3세]]가 허물고 새로운 양식으로 개축했다. 그러나 이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업적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. 헨리 3세는 에드워드를 자기 아들의 세례명으로 할 만큼 에드워드 참회왕을 깊이 공경했다. 그래서 에드워드의 유해를 모신 성당을 더욱 장엄하게 최신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했던 것이다. [[분류:잉글랜드 국왕]][[분류:웨식스 가문]][[분류:시성된 가톨릭교도 군주]][[분류: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장자]][[분류:가톨릭 성인]][[분류:성공회 성인]][[분류:1066년 사망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